존 에버렛 밀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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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에버렛 밀레이는 1829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화가로, 라파엘 전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다. 그는 11세에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윌리엄 홀먼 헌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함께 라파엘 전파를 결성하여 당시 화단에 반기를 들었다. 초기에는 세밀한 묘사와 자연 묘사에 집중했으며, 《오필리아》와 같은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결혼과 함께 화풍을 넓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초상화가로도 성공했다. 1896년 왕립예술아카데미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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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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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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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 | Sir John Everett Millais, 1st Baronet |
출생 | 1829년 6월 8일 |
출생지 | 영국, 햄프셔, 사우샘프턴 |
사망 | 1896년 8월 13일 |
사망지 | 영국, 런던, 켄싱턴 |
국적 | 영국 |
배우자 | 에피 그레이 (1855년 결혼) |
자녀 | 8명, 존 길 밀레이 포함 |
작위 | 준남작, PRA |
로마자 표기 | Mil-e-i Mi-lei |
직업 및 활동 | |
분야 | 회화 드로잉 판화 |
사조 | 라파엘 전파 |
훈련 | 왕립 예술 아카데미 |
대표작 | 오필리아 그리스도, 부모님 집에서 |
수상 | |
일본어 | |
일본어 이름 | ジョン・エヴァレット・ミレー |
한국어 | |
한국어 이름 | 존 에버렛 밀레이 |
2. 생애
존 에버렛 밀레이는 1829년 잉글랜드 사우샘프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39년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11세의 나이로 왕립예술아카데미 부속 미술학교에 최연소 입학, 1846년에는 연례 전시회에서 입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848년, 밀레이는 윌리엄 홀먼 헌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함께 라파엘 전파를 결성했다. 이들은 존 러스킨의 "예술은 자연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 작품인 『부모의 집의 그리스도』(1850)는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혹평을 받았으나, 『오필리아』(1852)는 모델 엘리자베스 시달의 신비로운 모습과 정교한 배경 묘사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53년 존 러스킨은 타임스 지를 통해 라파엘 전파를 옹호했고, 이에 감명받은 밀레이는 러스킨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러스킨은 유피미아(에피)와 함께 밀레이를 방문했으며, 1852년 밀레이는 에피를 모델로 『석방 명령』, 『존 러스킨의 초상』을 제작하며 러스킨 부부와 친분을 쌓았다. 러스킨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에 지쳐있던 에피는 밀레이에게 점차 마음을 빼앗겼고, 1854년 결혼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1855년 밀레이와 에피는 결혼했으나, 빅토리아 여왕은 에피의 알현을 거부하는 등 사회적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1856년 에피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가 태어났지만, 밀레이는 『가을의 낙엽(Autumn Leaves)』 등 주제가 없는 작품을 발표하며 이전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857년 『지나간 꿈-얕은 여울의 아이섬브라스 경(Sir Isumbras at the Ford)』은 혹평과 함께 러스킨의 비난까지 받으며 위기를 맞았다. 밀레이는 가족 부양을 위해 대중적 취향에 맞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1860년 『검은색 브런스윅 기병대원(The Black Brunswicker)』으로 명성을 회복한 밀레이는 1863년 『첫 설교(The First Sermon)』로 왕립예술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이후 아이들을 소재로 한 그림들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중 『비눗방울(Bubbles)』은 비누 광고에 사용되기도 했다.
밀레이는 디즈레일리 등 저명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초상화가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885년 준남작에 서임되었고, 1896년 왕립예술아카데미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인후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 빅토리아 여왕은 에피의 알현을 허락했다.
2. 1. 초기 생애와 라파엘 전파 결성 (1829-1854)
밀레이는 1829년 잉글랜드 사우샘프턴의 저명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저지 섬에서 보냈으며, 평생 그곳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졌다. 작가 서커리가 "언제 잉글랜드가 저지 섬을 정복했는가?"라고 묻자, 밀레이는 "결코! 저지 섬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습니다."라고 답했다.[4] 어린 시절 가족은 브르타뉴의 디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밀레이의 초기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예술과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격려했고, 왕립 예술 아카데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가족을 런던으로 이주시켰다. 밀레이는 훗날 "나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5]
1840년, 밀레이는 11세의 나이로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윌리엄 홀먼 헌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를 만났고, 1848년 9월 고워 스트리트에 있는 그의 가족 집에서 라파엘 전파를 결성했다.
밀레이의 초기 작품들은 세밀한 묘사와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부모 집의 그리스도》(1849–50)는 노동 계층의 성가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위그노》(1851–52)는 종교 갈등으로 헤어져야 하는 젊은 연인을 묘사하여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오필리아》(1851–52)는 자연주의적 요소를 통합하여 밀도 있고 정교한 그림 표면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스타일은 라파엘 전파를 옹호했던 비평가 존 러스킨에 의해 홍보되었다. 러스킨과의 친분으로 밀레이는 그의 아내 에피를 소개받았다.[6] 밀레이가 에피를 그리는 동안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에피는 러스킨과 수년간 결혼 생활을 했음에도 처녀였고, 그녀의 부모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결혼 무효를 신청했다.
2. 2. 결혼과 예술적 변화 (1855-1870)
1855년, 존 러스킨과의 결혼이 무효화된 후, 에피와 존 에버렛 밀레이는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다. 자녀들의 출생년도 순으로 에버렛(1856년생), 조지(1857년생), 에피(1858년생), 메리(1860년생), 앨리스(1862년생), 조프로이(1863년생), 존(1865년생), 소피(1868년생)이다.[7] 이 중 막내 아들인 존 길 밀레이스(John Guille Millais)는 자연주의자이자 야생동물 화가였으며, 밀레이의 사후 전기 작가이기도 했다.[7] 딸 앨리스는 찰스 스튜어트-워슬리(Charles Stuart-Worsley)와 결혼하여 앨리스 스튜어트-워슬리가 되었으며,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절친한 친구이자 뮤즈였고,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7] 에피의 여동생 소피 그레이(Sophie Gray)는 밀레이의 여러 그림의 모델이 되었는데, 이는 그들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8]
1856년, 유피미아와 사이에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이 무렵 밀레이는 『가을의 낙엽(Autumn Leaves)』 등 특정 주제가 없는 멜랑콜리한 작품들을 제작했지만, 화상이나 수집가들의 평가는 이전 작품들에 비해 결코 높지 않았다. 결정적인 위기는 1857년 왕립예술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지나간 꿈-얕은 여울의 아이섬브라스 경(Sir Isumbras at the Ford)』을 발표했을 때 찾아왔다. 이 작품은 “말이 기사보다 너무 크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조롱하는 풍자 만화가 신문에 게재되는 등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혼 후에도 밀레이를 계속 옹호했던 러스킨조차도 태도를 바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파국이다”라고 엄하게 밀레이를 비난했다. 결혼 후 8명의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던 밀레이는 “5실링 동전보다 작은 부분을 그리는 데 하루 종일 걸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이후 라파엘 전파의 엄격한 이상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1860년에 전시된 『검은색 브런스윅 기병대원(The Black Brunswicker)』(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독일 브런스윅 기병)은 당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낭만적인 주제와 의상의 주름의 아름다움으로 호평을 받았고, 밀레이는 잃어버렸던 명성을 되찾았다. 이후 일관되게 대중의 취향을 의식한 작품을 계속 그렸다. 1863년에는 왕립예술아카데미에 출품한 『첫 설교(The First Sermon)』가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선정되어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첫 설교』로 영국에 소녀 그림 붐이 일었다. 밀레이는 소녀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오직 미묘하고 조용한 표정만이 완벽한 아름다움과 공존한다.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얼굴을 그리려면 인격이 형성되고 표정이 정해지기 전 8세 전후의 소녀가 가장 좋다”고 말했다. “판시 픽처(Fancy Picture)”라고도 불리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았고, 그의 손자를 그린 대표작 중 하나인 『비눗방울(Bubbles)』은 컬러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지에 게재되었고, 후에 비누 광고에도 사용되었다.
2. 3. 후기 생애와 대중적 인기 (1871-1896)
결혼 후 밀레이는 더 폭넓은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러스킨은 이를 "재앙"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는 늘어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작품 생산량을 늘려야 할 밀레이스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윌리엄 모리스와 같은 비판적인 평론가들은 그가 인기와 부를 얻기 위해 "타협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그의 숭배자들은 휘슬러와 앨버트 무어와의 교류와 존 싱어 사전트에게 미친 영향을 지적했다. 밀레이스 자신은 예술가로서 자신감이 커짐에 따라 더욱 대담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글 "오늘날 우리의 예술에 대한 생각"(1888)에서 그는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를 예술가들이 따라야 할 모델로 추천했다. ''성 아그네스의 전야''와 ''몽유병자''와 같은 그림은 밀레이스가 강력히 지지했던 휘슬러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보여준다. 1862년부터 밀레이스 가족은 런던 켄싱턴 크롬웰 플레이스 7번지에 살았다.[9]1870년대 이후의 후기 작품들은 옛 거장들, 예컨대 조슈아 레이놀즈와 벨라스케스에 대한 밀레이스의 존경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들 중 많은 수가 역사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탑 속의 왕자들을 묘사한 ''탑 속의 두 왕자 에드워드와 리처드''(1878), ''북서 항로''(1874), ''롤리의 소년 시절''(1871)이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영국의 역사와 확장되는 제국과 관련된 주제에 대한 밀레이스의 관심을 보여준다. 밀레이스는 또한, 특히 ''거품''(1886) – ''피어스 비누'' 광고에 사용되어 유명하거나, 어쩌면 악명 높았다 – 와 ''체리 립''과 같은 어린이 그림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1896)은 "마지막 여정"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아들의 책을 위한 그의 삽화를 바탕으로, 이 그림은 사냥꾼이 벨트에서 죽어 있는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두 명의 구경꾼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기 그의 많은 풍경화는 대개 험하거나 위험한 지형을 묘사한다. 그중 첫 번째 작품인 「가을의 한낮(Chill October)」(1870년, 앤드류 로이드 웨버 소장)는 아내의 친정 근처인 퍼스에서 그려졌다. 이 작품은 밀레이가 말년에 주기적으로 그린 대규모 스코틀랜드 풍경화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대개 가을을 배경으로 하고, 종종 음울하고 그림 같지 않게 묘사되어, 쓸쓸함과 덧없음의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특히 「가을 잎」(맨체스터 미술관)과 「휴식의 계곡」(테이트 브리튼)과 같은 1850년대 후반의 자연 순환 주기를 그린 그의 그림을 연상시키지만, 그 의미를 가리키는 직접적인 상징이나 인간 활동은 거의 또는 전혀 없다.

1870년 밀레이는 본격적인 풍경화로 돌아와, 그 후 20년 동안 매년 8월부터 가을 늦게까지 사냥과 낚시를 즐겼던 퍼스셔의 여러 장면을 그렸다. 이 풍경화 대부분은 가을 또는 초겨울을 배경으로 하며, 황량하고 축축한 물가의 습지나 황무지, 호수, 강가를 보여준다. 밀레이는 "한 잎 한 잎" 풍경화 기법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1850년대 초 자신의 야외 작업에서 보여준 생생한 녹색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후기 작품에서 더욱 자유롭고 폭넓어진 화풍은 풍경을 정확하게 관찰한 것만큼이나 능숙하다. 많은 작품들이 퍼스셔(Perthshire)의 다른 곳, 특히 덩켈드(Dunkeld)와 버넘 근처에서 그려졌는데, 이곳에서 밀레이는 매년 가을 사냥과 낚시를 위해 큰 저택을 빌렸다. 1887년에 그린 그의 첫 번째 본격적인 눈 풍경화인 「크리스마스 이브」는 머슬리 성(Murthly Castle)을 향한 전망을 담고 있다.
밀레이는 1853년 왕립예술원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0년 후인 1863년에는 정회원으로 선출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1885년 7월,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미들섹스주 켄싱턴의 세인트 메리 애봇 교구 팰리스 게이트와 저지 섬 세인트 우앙에 거주하는 남작(Baronet)으로 서임했다.[12] 이로써 그는 세습 작위를 받은 최초의 예술가가 되었다.
1896년 레이턴 경이 사망한 후, 밀레이스는 왕립예술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후반부에 그는 인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13]
또한, 1881년에서 1882년 사이에 밀레이스는 버밍엄 왕립 예술가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14]
3. 주요 작품
; 오필리아
미레이 자신과 빅토리아 시대 최고 걸작으로 명성이 높은 이 작품은 1862년 로열 아카데미 전에 출품된 것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여주인공 오필리아를 소재로 한 것이다. 강물에 거꾸로 떠 있는 소녀의 모델은 후에 로세티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스 시달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에 이 그림에 언급한 부분이 있다. 또한 일본화가 야마모토 큐진이 이 그림의 영향을 받은 『물 위의 오필리아』(원제:『아름다운 시체』)를 그렸다.
; 기타 작품
그 외 다수.
4. 평가와 영향
밀레이는 1896년 사망했으며, 웨일스 공(에드워드 7세)은 기념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그의 동상 건립을 의뢰했다.[15] 토마스 브록이 제작한 이 동상은 1905년 영국미술국립갤러리(현 테이트 브리튼) 정원 동쪽에 설치되었다. 그해 11월 23일, ''팔 몰 가제트''는 이 동상을 "우리가 알고 있던 그를 특징적인 자세로 보여주는 산뜻한 동상"이라고 평가했다.[15] 1953년, 테이트 관장 노먼 레이드는 이 동상을 오귀스트 로댕의 ''세례자 요한''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고, 1962년에도 다시 제거를 제안하며 그 존재가 "매우 해롭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동상 소유주인 영국 공공사업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소유권은 1996년 공공사업부에서 영국 문화유산으로, 그리고 다시 테이트로 이전되었다.[15] 2000년, 스티븐 더처 관장 재임 시절, 이 동상은 건물 측면으로 옮겨져 개조된 맨턴 로드 입구를 찾는 방문객을 맞이하게 되었다.[15] 2007년, 밀레이를 주제로 한 대규모 회고전이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서 열려 15만 1천 명의 관람객을 기록했다.[16] 이 전시회는 이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을 거쳐 일본 후쿠오카와 도쿄에서도 열려 총 66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밀레이와 러스킨, 에피와의 관계는 1912년 무성영화 ''존 러스킨의 사랑''을 시작으로 여러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무대극, 라디오 드라마, 오페라도 제작되었다. 엠마 톰슨이 각본을 쓴 2014년 영화 ''에피 그레이''에서는 톰 스터리지가 밀레이 역을 맡았다.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두 편의 BBC 시대극의 주제가 되었다. 첫 번째 작품인 ''러브 스쿨''은 1975년에 방영되었으며, 피터 이건이 밀레이 역을 맡았다. 두 번째 작품은 ''절망의 낭만주의자들''이며, 새뮤얼 바넷이 밀레이를 연기했다. 이 드라마는 2009년 7월 21일 화요일 BBC 2에서 처음 방송되었다.[17] 로리 카이내스턴은 엘리자베스 맥닐의 ''인형 공장''(2023) 파라마운트+ 각색에서 밀레이를 연기했다.
참조
[1]
LPD
[2]
EPD
[3]
DNB
[4]
간행물
Chums annual
1896
[5]
서적
Millais: three generations in nature, art & sport
Sportsman's Press
[6]
서적
Parallel Lives: Five Victorian Marriages
A. Knopf
[7]
음반
Liner notes to EMI CD CD-EMX-2058
[8]
서적
The Model Wife
[9]
웹사이트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Tate Gallery, London
https://web.archive.[...]
Tate.org.uk
2014-01-29
[10]
웹사이트
John Everett Millais
https://library.nga.[...]
[11]
웹사이트
Image Collections
https://www.nga.gov/[...]
[12]
London Gazette
1885-07-14
[13]
서적
Memorials of St Paul's Cathedral
Chapman & Hall, Ltd
[14]
서적
The Year's Art
https://books.google[...]
[15]
웹사이트
Sir Thomas Brock 1847–1922
http://www.tate.org.[...]
2008-04-05
[16]
웹사이트
Millais – Exhibition at Tate Britain
https://www.tate.org[...]
[17]
보도자료
BBC Drama Production presents Desperate Romantics for BBC Two
http://www.bbc.co.uk[...]
BBC
2008-08-07
[18]
서적
イギリス美術
[19]
웹사이트
Sir John Everett Millais, 1st Bt.
http://thepeerage.co[...]
2024-01-02
[20]
서적
花と果実の美術館 名画の中の植物
八坂書房
[21]
D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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